Monday 20 March 2017

민족대표 33인과 친일파(3)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민족대표 33인과 관련된 팩트 점검 3탄이다.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가 : http://anehistory.blogspot.ca/2017/03/33.html
1탄 : http://anehistory.blogspot.ca/2017/03/33-1.html
2탄 : http://anehistory.blogspot.ca/2017/03/33-2.html

1탄에서는 행적이 확실하고 쉽게 자료가 입수되는 독립운동을 계속한 12인을 소개했다.
2탄에서는 행적이 확실하고 독립운동도 계속하였으나 자료를 찾기가 어려운 11인을 소개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이상 23인은 그 누구도 비판하기 어려운(그 중 몇 사람의 독립운동을 소극적인 운동이었다고 비판할 여지가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에 지나지 않는다.) 인물들이다.

이번 편에서는 상대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될 만한 7인과 확실하게 친일을 한 3인을 다루려고 한다.

1. 종교 활동에 전념한 이들 (6인)

이 분들도 크게 셋으로 나뉜다. 종교 활동에 전념하였으나 여러 형태로 독립운동에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3인과, 전적으로 종교 활동에만 전념한 3인이다. 전자는 김완규 선생, 임예환 선생, 홍기조 선생 세 분이고, 후자는 길선주 목사, 나용환 선생, 나인협 선생이다.

김완규 선생 : 천도교 대표. 손병희의 측근. 손병희에 의해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심문을 당할 때 망설임없이 "다시 기회가 온다면 언제든지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나설 것"이라고 독립의지를 피력하였다.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이전 1910년부터 천도교월보의 발행인으로 있었는데, 천도교월보는 한일병합을 비판하는 등 항일언론이었고, 일제의 탄압으로 1937년 6월에 폐간된다. 참고논문에서 폐간 당시 김완규 선생의 직함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확인이 되지 않으나, 지속적으로 천도교월보의 리더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자료- "천도교의 민족대표 김완규와 그의 독립정신", 동학학보 제11권 2호

임예환 선생 : 천도교 대표.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에 참여하였다. 출옥 후 활동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찾을 수 없지만 다수의 자료들이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는 분.

홍기조 선생 : 천도교 대표. 3.1운동 이후 천도교 도사, 장로로 지내면서 청소년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한 것으로 나온다. 정확히 무엇을 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이를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을지는 더 확인이 필요하다.

길선주 목사 : 기독교 대표. 3.1운동 당시 태화관 모임에 늦어 따로 자수하여 일제의 심문을 받았다.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무죄 선고를 받아 대한민국 독립과 관련된 훈장을 받지 못하다가, 미결수로 1년 7개월 간 옥고를 치른 사실이 알려지면서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이후 종교 활동에 전념하게 되는데, 일제 치하의 우리나라를 로마 제국 치하의 이스라엘과 동일시하면서 계시록을 바탕으로 한 부흥사경회에 집중했다. 일제를 이스라엘의 적이었던 로마와 동일시했으므로 기본적으로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듯하나, 현실을 뒤집어 엎을 수 없다고 보고 이승 이후의 삶 쪽에 주력한 듯. 1935년에 사망.

나용환 선생 : 3.1운동 이후 행적이 상세히 기록된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대체로 천도교 포교에 전념한 것으로 본다. 1936년에 사망하였다.

나인협 선생 :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에 참여한 외에는 주로 천도교 종교활동에 집중하였다. 1951년 사망.


2. 논란의 대상인 인물

이갑성 선생 : 기독교 대표. 일단 약력을 훑어보면 논란 자체가 되지 않을 완연한 독립 투사다. 3.1운동 당시 23세의 젊은 나이로(김창준, 박희도와 함께 최연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신간회 결성 시 창립 멤버로 참여, 1931년 신간회 사건으로 조선총독부서 체포령이 떨어져서 1933년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에서 독립 운동을 펼치다가 1938년 귀국한다. 귀국과 동시에 흥업구락부에서 활동하다가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했다. 해방 후에는 주로 우익 계열에서 활동했다. 1965년 광복회 회장을 지냈다.

이갑성 선생의 친일 의혹은 몇몇 독립운동가들이 그가 임정에 참여할 당시 일제의 이중간첩이었다고 증언하면서 시작되었고, 창씨개명을 한 것으로 인해 강화되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창씨개명을 한 사람은 변절자 최린, 변절자 정춘수, 그리고 이갑성 세 사람이다.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인 임종국 선생과 그에 의해 탄생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특히 그의 40-45년 사이의 행적을 조사하여 그의 친일의혹을 집중 부각시켰다. 그러나 2005년 3.1절 특집 SBS 뉴스 추적 "누가 변절자인가" 편에서 면밀한 검증이 이루어졌고, 이후 현재 학계에서 이갑성의 친일 의혹은 사라진 상태다. 이후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친일인명사전에서 그의 이름을 빼는 것으로 학계의 의견에 동의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2005년 이전 자료에서는 이갑성 선생의 친일 의혹 제기가 종종 등장하지만, SBS 특집이 방영되고 그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진행된 2007년 이후 자료에서는 이갑성 선생의 친일 의혹이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따라서 이 분의 정확한 타이틀은 "논란이 있'었'던 인사"가 되어야 하며, 활동 약력을 통해 볼 때에는 행적이 확실한 독립운동가 반열에 들어가야 할 것으로 본다.


3. 변절자 3인

어떤 자료들은 변절자 3인 중 정춘수가 105일 간의 고문을 당한 끝에 전향하여 상대적으로소극적인 친일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급을 나누어 볼까 했는데, 직접 정춘수의 활약상을 목도하고 나니, 도저히 그렇게는 쓰지 못할 것 같아 세 사람을 함께 다루도록 하겠다.

정춘수 목사 : 1938년까지는 나름 독립투사였다. 목회 활동을 하면서 신간회에 참가하기도 했고 흥업구락부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105일 동안 고문을 당한 뒤 전향서를 발표하고 친일로 돌아섰다. 친일 내역은 상당히 화려한데, 일제의 비호를 받아 조선 감리교의 수장이 되고, 일제의 시책 대로 조선 감리교회와 일본 감리교회의 통합에 앞장 섰으며, 신사참배에 앞장서고, 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에도 적극 협조하여 교회와 철문 등을 헌납하고 심지어 감리교 소속 교회를 몇 개 팔아 비행기 3대를 헌납하기도 했다. 아마 정춘수의 친일이 소극적이었다고 평가한 일부 자료들은 그가 주로 친일 활동을 한 단체의 직함들을 가지고 있었을 뿐, 개인적으로 나서서 강연을 한다든지 그런 종류의 친일 활동을 안 했기 때문에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고 평가한 모양인데, 수장이라는 직함을 단 단체에서 저런 짓을 했다는 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정춘수의 책임이다.

최린 : 3.1운동과 이후 일제의 심문을 받던 당시 그의 행보를 "당당하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으나, 이후 변절하여 거의 "천도교 전체"를 일제에 들어다 바치는 행위를 했다. 신간회 활동을 하면서도 "민족개량주의"를 주창하며 총독부와 밀착된 행보를 이어갔고, 34년에는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는 등 본격적인 친일을 한다. 강연, 학병 권유, 내선일체 지지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적극적인 친일 행적을 남겼다. 다만 해방 후 반민특위에 참석해서는 나름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 다른 이들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것으로 죄를 덮을 수 없으니 탈이지만.

박희도 목사 : 기독교계에서 최린과 유사한 행보를 보이며 아주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다. 민족개량주의를 주창한 것, 34년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것 등이 최린과 유사하다. 최린과 함께 강연을 다녔고, 동양지광이라는 잡지를 창간해서는 각종 논설을 실었는데, 내용은 말할 것도 없는 그렇고 그런 내용들. 학병 권유 강연도 무지하게 다녔다고 한다.


이상으로 민족대표 33인의 일대기를 대략 훑어 보았다. 공개된 자료인 위키백과, 나무위키등의 문서를 많이 참조하고, 이문영 작가의 물밑한국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학문적인 연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일부 인사들에 대해서는 위키에 상세히 나와 있지 않아 논문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들을 참고했다.) 그러나 위키백과의 장점 중 하나는 학계의 다수설과 대중의 인식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설민석 강사의 옛 강의로부터 촉발된 논쟁에서, 많은 이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위키백과조차도 훑어보지 않고 민족대표 33인에 대해 함부로 말한 점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최소한 23명(실질적으로 친일 의혹이 사실상 풀린 이갑성 포함 24명)은 일생토록 적극적인 항일 독립 운동을 한 분들이고, 3명은 종교 활동에 주력했으나 민족 정기를 함양하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항일 활동을 이어갔으며, 3명은 친일도 반일도 하지 않고 종교 활동에만 전념했고, 3인은 변절자가 되었다.

물론 3인의 변절자도 나오지 않고 모든 이들이 적극적인 독립투사가 되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 분들의 일대기를 보면서 어찌 이 분들을 함부로 욕할 생각을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면이 더 많다. 3.1운동에 대중의 영향이 더 컸느냐, 지도자들의 영향이 더 컸느냐 하는 것은 사관이 다른 이들이 충분히 논할 수 있는 역사 논쟁이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다르다고 자신의 시대적 한계 속에서 성실히 독립운동하며 살아간 분들을 폄하하고 욕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

다음 편에는 미리 예고한 대로, 3.1운동 당시의 민족대표 33인의 행적에 대하여 좀 이야기해보겠다. 또한 후손들에 대한 인신공격도 댓글에서 이어지고 있는데 이 부분도 좀 조사하여 글로 남겨 보겠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또 찾아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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