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18 March 2017

민족대표 33인과 친일파(2)

최종업데이트 : 2017.3.24
 

2탄이다. 원래는 논란의 대상이 될만한 사람이 많을 줄로 알고, 이번 편에 논란의 대상들을 다루겠다고 했다. 조사하면서 느낀 바는 애초에 논란의 대상이 될만한 인물 자체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사람들이 진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생각만 옳다고 여기고 싶은가 보다.

이번 편에는 11분의 민족대표의 3.1운동 이후 행적을 적어보았다. 조사하는데에만 3시간이 걸렸다. 대부분의 자료가 3.1운동 당시 행적 중심이라 일일히 검색하고 찾아보아야 했다. 자, 지난 편(행적이 확실하고 자료가 쉽게 입수되는 12분의 민족대표)에 이어 이번 편에는 행적은 확실한데 자료가 쉽게 입수되지 않거나 논란을 일으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억지 논란을 일으키는 인물 11분의 민족대표를 다루어 보겠다. 이 말의 의미가 아직 다루지 않은 10명은 논란의 대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분들은 다음 편에서 한꺼번에 다루겠다.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가 : http://anehistory.blogspot.ca/2017/03/33.html
1탄 : http://anehistory.blogspot.ca/2017/03/33-1.html

이 글들을 먼저 읽고 보시면 더 좋겠다.


손병희 선생 : 천도교 대표. 손병희 선생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도 대표로 이름이 나올 정도로 민족대표 중에서도 대표로 인정받는다. 이 분을 행적이 확실하고 자료가 쉽게 입수되는 첫 번째 14인 명단에서 뺀 것은 이 분에 대해 논란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이다.

이번에 설민석 강사의 강의에서도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모인 이유가 거기 마담(?)이 손병희 선생과 그렇고 그런 사이여서였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문제는 얼마나 사실이냐는 건데, 손병희 선생이 기생 출신의 세 번째 부인과 결혼한 것은 맞다. 다만 학계에서는 손병희에 대한 악의적 루머들은 조선총독부에서 퍼뜨린 소문이 꽤 많다고 보고 있다. 3.1운동 당시 일제 당국의 발표 등을 분석한 연구가 있는데, 그 때 자주 다루었던 기사가 “요승 손병희의 엽색 행각”이었다고 한다. 교수 신복룡이 일제의 이런 자료들을 분석하여 “3.1운동은 기생집에서?”라는 기사를 어느 신문에 냈는데, 아마 이것이 현대에 손병희 선생을 폄하하는 평가의 출발점이 된 듯하다. 심지어 신문 삽화는 기생들이 민족대표에게 서빙하는 장면으로 그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 천도교와 독립운동가 유가족들이 반박하여 신복룡 교수가 사과했다고 한다.

손병희 선생은 일제의 고문을 받다가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1922년에 별세하였는데, 당시 일제는 가만두면 죽을 것으로 보이는, 상태가 매우 악화된 수인들을 일부러 병보석으로 석방하여 감옥 밖에서 죽음을 맞게 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감옥에서 죽으면 여론이 더 악화될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손병희 선생이 이 케이스였던 것 같다. 이 분의 일생에 대해 여러 말이 나올 수 있겠으나,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다가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은 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듯싶다.

김창준 목사 : 기독교 대표. 3.1운동으로 2년 6개월을 복역한 김창준 목사는 출옥 후 1923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1927년 귀국, 기독교 사회운동을 강조하던 진보적 기독교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기독교 사회주의 성향의 ‘기독신우회’를 창립하였고, 일제의 대륙 침략이 강화되던 1935년에는 한인근거지를 구축하기 위해 만주로 가서 해방될 때까지 그곳에서 경제 운동을 벌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독립선언 직후 끌려간 일제 총독부 취조실에서 하루 세 차례씩 고문을 당하고 매일 물도 없이 주먹밥 하나로 배고픔을 견뎌야 했으며, 11일 만에 18kg의 체중이 줄어든 상황을 증언하고 있는데, 당시 민족대표들이 감옥에 들어가 겪은 고초가 얼마나 컸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김창준 목사의 항일운동은 매우 철저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문영 작가의 물밑한국사나 위키백과에조차도 그에 대한 정보가 잘못되어 있는 점이 많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http://premium.mk.co.kr/view.php?cc=100000&field&keyword&page=3&no=15381
http://www.ssu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935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65395.html#csidx521685f3372fa89a274820b091bc2b6

홍병기 선생 : 천도교의 홍병기는 출옥 후에 만주로 가 고려혁명당 고문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또 옥고를 치렀는데 그 손자는 닭튀김 장사를 하다가 실패하고 아내가 동사무소 공공근로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권병덕 선생 : 독립 선언 직후 일제 경찰에 연행돼 2년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7년 천도교인들과 함께 신간회 활동에 참여했다. 1930년대 중후반 일제가 민족말살 정책을 강화하자 독립투사들의 활동을 수록한 역사책을 저술해 펴내려다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기도 했다. 1943년 향년 7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2/28/0200000000AKR20170228024300014.HTML

권동진 선생 : 천도교 대표. 3.1운동 이전에는 을사늑약 반대운동, 남궁억의 대한협회 등 참여. 3.1운동 당시 일본 판사의 신문에 권동진은 "독립이 될 때까지는 어떻게든지 할 것"이라고 말했고, 그 말을 지켰다. 3.1운동에 참여하여 3년간 복역한 뒤, 1926년 국민당을 조직, 당수가 되어 민족독립운동의 진행을 계획하였지만 밀정에 의해 사전 검거된다. 1927년 신간회 부회장이 되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적인 시위 확대를 계획하여 다시 연행된다. 신간회에서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가 잡혀가서 1년간 복역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 분을 요시찰인물로 지정, "조선독립을 몽상하여 그를 위해 운동할 우려가 있음"이라고 평함.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1930년대 이후로는 주로 천도교 활동에 전념했다는 점이지만, 독립운동을 완전히 놓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게, 광복 후 민족 지도자로 인정받고 임시정부 측에서 많은 활동을 한다.(김구, 이승만, 오세창 등과 함께 한민당 영수로 추대되었지만 사양했다든지,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정 요인들을 맞이했다든지. 김구 주관 순국선열추념대회 부회장으로도 뽑힘.)
위키백과 참조.
http://premium.mk.co.kr/view.php?cc=100000&field&keyword&page=3&no=15381

이필주 목사 : 기독교 대표. 3.1운동 이전에는 상동청년회에 가입, 기독교청년회(YMCA) 등에서 독립 운동을 했다. 3.1 운동 당시에는 2년 간 옥고를 치른다. 출옥 후 미아리 청파동 용두동 신촌 등의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부설 유치원, 소학교, 부녀자를 위한 야학 등을 개설하여 육영사업에 힘썼다. 이후 노령으로 서울을 떠나 수원 남양교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1942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http://33in.co.kr/bbs/content.php?co_id=person33_3

백용성 스님 : 불교 대표. 3.1운동으로 1년 6개월 간 복역 후 일본의 대처승 정책에 반발하여 불교계 정화를 위해 노력. 불상, 불교 유물 등을 가장하여 상해로 꾸준히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었다고 한다. 1930년 윤봉길 의사를 제자로 삼은 뒤, 그를 상해로 보내어 의거를 일으키게 했다.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가 장제스, 마오쩌둥 등을 만나 대한의사군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실제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제 밀정에 의해 작전이 들통나 북간도에 마련되었던 독립군 거소가 완전 파괴되고 만다. 태평양 전쟁 소식을 듣고 피를 토한 뒤 열반.
위키백과 참고

유여대 목사 : 기독교 대표. 태화관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것 때문에 어떤 이는 이 분을 민족대표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한다. 앞뒤 사정을 모르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다. 이 분이 태화관 모임에 못 온 이유는 같은 날 의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한양에 올라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군중을 지휘하며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중 현장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따라서 민족대표를 비판하는 이들이 시위 현장에 오지도 않고 스스로 잡혀 들어갔다는 비판은 이 분께는 타당하지 않은 것이 되겠다.) 옥고를 치른 후 폐교에 이른 양실학교를 재건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고, 병석에서도 민족 계몽을 위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고 그 판매대금을 고아들을 위하여 쓰다가 1937년에 순국.
http://33in.co.kr/bbs/content.php?co_id=person33_14
http://www.mpva.go.kr/narasarang/month_hero_view.asp?id=165&ipp=12

최성모 목사 : 기독교 대표. 3.1운동 당시 황해도 지역 시위를 주도했다. 3.1운동으로 복역한 이후, 감리교 연회에서 그를 만주로 파견하여, 만주 펑톈에서 목회자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6년 사망.
http://33in.co.kr/bbs/content.php?co_id=person33_29

박동완 목사 : 기독교 대표. 3.1운동에 참여하여 복역한 뒤, 출소 후 신간회 간사를 맡았다. 1925년에는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했다. 1927년 신간회 본부 상임간사를 맡았다. 1927년 중국 동삼성에 거주하는 한인이 중국 관헌으로부터 귀화를 강요받고 박해받자(만보산사건), 재만동포옹호동맹을 결성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에 임명된다. 1928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특파원으로 중국 봉천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만주 지역 동포들의 상황을 살폈다. 1928년 하와이에서 청빙을 받아 12년간 목사로 재직하였고, 목회 활동과 함께 한글, 한국 역사, 한국 문화를 전파하고 교포 2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사업에 집중했다. 이 시기 국내의 흥업구락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한 것으로 보는 자료가 많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1941년 사망. 3.1운동 이후 일본과 같은 시간을 쓰지 않기 위해 시계를 30분씩 늦춰놓고 사용했다고 한다.'
위키백과
http://www.mpva.go.kr/narasarang/month_hero_view.asp?id=344&ipp=12
http://kcm.kr/dic_view.php?nid=20084&key=8&kword=&page=

이명룡 장로 : 기독교 대표. 3.1운동 이전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날을 세우고,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 동안 복역하는 등 항일 활동을 하였다. 3.1운동으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출옥한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강우규 의사의 총독 저격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헌병에 검거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을 조직하여 정계와 교육계에서 활약했다. 평생 농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http://www.hddy.or.kr/bbs/board.php?bo_table=sub04_03&wr_id=138&page=3
http://w3devlabs.net/korea/archives/tag/%EC%9D%B4%EB%AA%85%EB%A3%A1



총칼들고 싸우거나 일제의 압박에 무조건 치받고 일어서서 감옥에 수차례 들어가는 것만을 적극적인 항일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기 기록에 있는 분들 중 일부에 대해 탐탁치 않아 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해도, 여기 이 분들은 대부분 적극적으로 항일활동을 하신 분들이고, 아닌 분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항일활동을 지속하신 분들이다. 일부 행적을 비판할 수는 있을 지 몰라도, 욕을 하거나 폄하하거나 거짓된 루머를 퍼뜨려도 될만한 분들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상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최소한 23인이 적극적인 항일 활동을 하셨음을 증명해 보았다. 다음 편에서는 적극적 항일 활동보다는 주로 종교 활동에 전념한 것으로 보이는 6명의 민족대표(이중 2~3명은 나름의 항일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나 증거가 확실하지 않은 분들)와 논란의 대상인 인물 1명(이갑성이라는 분으로 표면적인 행보는 매우 적극적인 독립투사였으나 몇몇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일제의 이중 첩자가 아니었는지 의심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변절한 세 사람에 대해 다루어 보겠다.

그 외 다음 편 예고
"과연 1920년대 대부분의 민족대표가 변절하였는가? - 설민석 강사의 주장에 대한 사료를 통한 답변"
"모두가 믿고 있다. 그들은 자수했노라고. 정말 그랬을까?"
"후손들이 친일파 후손이라 떵떵거리고 산다고? 배가 부르니까 저런 단체도 만들고 한다고? 진실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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