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17 March 2017

민족대표 33인과 친일파(1)

기왕 이렇게 된 거 할 일도 많고 먹고 살기도 바쁘지만 한 번 사료를 뒤적거려 보자. 어제 오늘 몇몇 언론들이 적극적으로 진실을 밝혀준 덕분에 기사 댓글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긴 했다.

어제 댓글 분위기 :
1. 33인 중 만해 한용운 한 명 빼고 다 변절했다! 혹은 대다수가 변절했다.(이 사람들이 99%)
2. 33인 중 변절한 사람 3명 뿐이다.(1%)

오늘 댓글 분위기 :
1. 어제와 같은 주장 (40%)
2. 친일 안 했다고 해서 당당할 수는 없다. 적극적으로 친일을 안 한 것뿐이지 독립운동하신 분들과 똑같이 대하면 안 된다. (20%)
3. 이후 행적이 문제가 아니라 3.1운동 당시의 행적은 비판받아 마땅하다.(20%)
4. 33인 중 변절한 사람 3명 뿐, 우리 조상을 우리가 욕 보여서는 안 된다.(20%)


이 중 오늘 댓글 3번 주장은 다시 논할 필요가 있는 문제다. 일단 1번과 2번 주장에 대해 검증에 들어가보자. 그 분들은 4번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머리가 없다" "주입당한 대로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팩트 검증을 해 보자는 거다. 바빠 죽겠어도 우리를 위해 피까지 흘렸던 우리 조상들을 함부로 폄훼하는 행동에 너무 화가 나서 못 견디겠어서다.

일단 급한대로 그 누구도 깔 수 없는 영구까방권 획득하신 확실한 몇 사람만 먼저 얘기해 보자.

만해 한용운 : 1번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인정하는 분이니 굳이 얘기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민족대표 33인이 3.1운동 당시 일제에 자수하여 잡혀들어간 것 자체가 변절인양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따지면 그들이 그렇게 칭송해 마지않는 만해 한용운도 변절자가 된다. 자수했으니까. 다시 이야기하지만 당일의 행적에 대해 비판의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 부분은 따로 논해야 한다. 일단 만해는 변절하지 않은 것으로 하고 넘어가자.

김병조 목사 : 민족대표들이 자수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빅엿을 먹이시는 행적을 보여주신 분. 사정 때문에 한양에 늦게 도착하여 태화관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고, "자수도 하지 않았다!" 이 분은 상해로 망명하여 임정에 참여하고, 민족 정신을 고취하는 여러 사서를 저술하시며 끝까지 독립운동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이 분을 변절자라고 주장하려면 김구 선생도 변절자라고 생각해야 한다.(그 정도로 확실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지 김구 선생을 폄하하려는 건 절대로 아니다.)

남강 이승훈 : 기독교 대표 중에서도 수장으로 참여했다. 안창호의 강연에 감명을 받아 신민회에 들어갔고, 이후 교육자로서의 생을 산다.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되었고, 105인 사건으로 5년 간 감옥살이 했으며,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선언을 하고 다시 감옥살이하여 33인 중 가장 늦게 출소했다. 그 후 조만식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에 전념하다가 1930년 작고. 총들고 싸우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국사교과서에 기록된 사건 5가지에 연루되신 분이다. 이 분을 까려면 안창호를 비롯하여 당시 자강론을 주장한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모두를 우리 역사에서 파내야 한다.

오세창 선생 : 천도교 대표 중 한 분이었고, 일제의 숱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간송 전형필의 스승이었으며 간송과 함께 우리 문화재를 되찾아오고 보존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의 현판에 "민족정기"라는 네 글자를 남긴 그야말로 독립운동가의 표본과 같은 인물.

양한묵 선생 : 천도교 대표 중 한 분이셨으며 3.1운동 후 감옥에 갇혔을 때 모진 고문을 당하고 고문 후유증으로 그대로 옥사. 민족대표를 까는 이들이 그렇게 원하는 "독립운동으로 목숨 버린 분" 중에 한 분이 이 분이다.

신홍식 목사 : 기독교 대표로 3.1운동에 참가. 옥고를 치르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계속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여러 차례 감옥에 투옥. 항일활동으로 가세가 기울어 이 분의 자녀는 광복 후 막노동판을 전전했다고 한다. (민족대표 까는 이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고생많이 한 민중이 바로 이 분 후손이다. 하긴, 그 후손도 깠지? 친일파 후손이라면서..)

신석구 목사 : 기독교 대표. 3.1 운동 후 1938년 신사참배 거부. 1945년 전승 기원 예배 거부로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감옥에 얼마를 가 있었던 건지..

이종일 선생 : 천도교 대표로 3.1운동에 참가했고 보성인쇄사 사장으로 선언서 인쇄를 담당했다. 3.1운동으로 2년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하자마자 1922년 3월 1일에 천도교 교인을 중심으로 제2의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하려다가 탄로나 다시 감옥에 간다. 그 후 또 다른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한국독립비사라는 역사책을 쓰다가 탄로나 압수당하였다. 이후 영양실조와 고문 후유증으로 1925년 순국. 2년 6개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지 3년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분이 변절자인가? 말해보라, 설민석!

이종훈 선생 : 천도교 대표로 동학농민운동에도 참가했던 최고령자였다. 옥고를 치른 후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역시 고문 후유증으로 1931년 순국.

박준승 선생 : 천도교 대표. 3.1운동 때 호남 지방 민중 봉기를 주도하고 감옥에 갇혀 1921년 옥사.

오화영 목사 : 기독교 대표. 단순히 독립선언서에 서명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목회하던 개성과 원산에 만세운동 조직을 만든 것이 들통나 중형을 선고 받음. 이후 신간회 참여. 광주학생운동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모두 3번이나 옥고를 치름.

양전백 목사 : 기독교 대표.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3.1운동으로 다시 옥고를 치른다. 그의 주도로 선천 지역에서 만세 운동이 열렸다. 목회를 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33년 사망.


일단 급한 대로 행적에 논란의 여지가 없고 확실하게 항일 활동을 하셨으며 자료가 쉽게 입수되는 분들 12명을 먼저 적어 봅니다. 다음편에는 논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보고 싶은 사람들이 논란 거리로 만들고 싶어하는 다른 분들을 다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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